내가 간 곳/저기

[2017 london&paris] 더 늙기 전에

스프링캣 2017. 8. 12. 00:0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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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삶은 재미가 없었고, 한 거 없이 나이만 먹어버렸다. 체력은 바닥을 쳤고, 퇴근하면 옷만 갈아입고 시체처럼 누워있다 저녁 9시도 되기 전에 잠들었다.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았다, 아니 어제도 오늘도 3주 전 어느날도 다 비슷비슷했다.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, 그 무렵 직장에선 너 더 짜증나라는 배려인지 각기 다른 인간들이 결이 다른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.

아, 어딘가 가라는 거구나, 라고 느낀 어느 날. 충동적으로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열고 생애 첫 유럽행 비행기표를 샀다. (내 기준) 비쌌다. 1년에 두어 번 꼬박꼬박 해외여행을 갔지만 내 여행비용 기준은 언제나 다 합쳐 그 달의 월급 정도였으니 유럽행은 내게 큰 모험인 셈이었다. 하지만 솔직히 그 동안 유럽여행을 생각도 안 했던 건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. 영어를 못하면서 가도 되는 걸까, 하는 생각에다가 검색 조금만 하면 나오는 다양한 소매치기 글이 여행 욕구를 확 사라지게 했으니까. 거의 대부분 혼자 여행을 가는데,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내 돈 들여 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행을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, 작년에 유럽에 다녀온 친구가 엄청 좋았다며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유럽 꼭 다녀오라고 눈을 빛내며 얘기해 준 게 마음에 남아서였다.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는데, 겨우 8-9시간 근무하고 2-3시간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방전되어 눕고 자기 바쁜 내가 나이를 더 먹으면 정말 놀지도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정말이지 더 늦기 전에, 아니 더 늙기 전에 유럽 땅을 밟기로 한 것.

항공권을 사고 나서는 검색은 짧게 하고 바로 런던 파리 숙소를 예약하고, 유로스타 티켓을 구입하고, 환전까지 3월이 되기 전에 해 두었다. 여행은 7월이니 4개월 동안 꼼꼼하게 준비하고 영어공부도 해서 신나게 여행해야지, 라고 생각했다... 생각만.

영어공부는 결국 안 했고, 다양한 패스 예약 루트 설정 이런 것도 아예 접어둔 채 혐(오스러운 현)생을 살았다. 괴로워하며 집에 와서 씻지도 않고 누워서는 그래도 방학하면 바로 한국을 뜰 나, 를 상상하며 웃으며 잠들었지만 그게 전부.

여행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서둘러 뮤지엄패스를 사고, 뮤지컬 예매를 하고, 바토무슈 티켓을 샀다. 일정은 닥치면 짜기로 했고,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한 편씩을 신중하게 골라 네이버에서 구입했다. 노팅힐과 비포선셋.

가방을 쌌고 아무것도 산 거 없는데 벌써 22.5키로 무게를 자랑하는 내 트렁크를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. 그래도 조금은 설렜다. 어쨌거나 첫 유럽이니까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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