소울푸드
야자시간을 버텨내려고 하루에 캔커피를 다섯 개씩 사 마시던 기억(맛은 참 없었지. 고등학교라 자판기가 없어서 그만).
대학에 입학해서 가장 신났던 것은 자판기 커피가 백 원이라는 사실(요즘은 얼마지? 아마 두 배는 넘을 거야).
어디로 여행을 가든 언제나 챙겨가는 모*골드 커피믹스.
비싼 원두도, 바리스타의 현란한 솜씨도 잘 깨닫지 못하는 무딘 혀를 가지고 있지만
그래도 한 모금 마시고 이것이 모*골드 커피믹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는, 나는 그런 인간.
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났으니 한 잔, 출근하면 출근했으니 또 한 잔,
사람들 때문에 열받았을 땐 열받았으니 한 잔, 맛있는 게 생기면 그거랑 같이 마시려고 또 한 잔.
세상 마지막 순간,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모*골드 커피믹스를 한 잔 타서 마시고 싶은 걸 보면
내 인생의 소울푸드는 커피믹스인가 싶기도 하다.
'소울푸드'라는 제목의 책을 서점에서 보고 냉큼 집어왔다.
'국내 인기 작가 21인이 선사하는 영혼의 포만감' 이라는 선전 문구에 혹했나,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.
'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'라는 말도 조금은 부끄럽고.
그저 음식에 얽힌 사람들의 추억이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.
21명의 글 중 기억에 남는 건 이지민 작가와 조동섭 씨의 커피에 대한 글.
아니, 커피와 생존, 커피와 욕망에 대한 글이었던 것 같다.
악착같이 살아가야 하는, 살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건 의외로 작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.
다른 이들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지금의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.
세상의 많은 음식들에 추억이 덧씌워지는 걸 보니
새삼 나도 많이 늙었구나, 하는 생각이 든다.
더 늙기 전에 더 좋은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먹으며 더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야지.
비어가는 마음을 아름답게 채워야겠다는 생각이,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.
그런데...
맛있는 음식을 원없이 먹으며 날씬하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... 없겠지?
아, 마음은 채우고 싶지만 몸을 살찌우기는 싫다고. ㅠㅠㅠ